2026년 9월 27일
홈  ›  칼럼

마음의 거울 ⑫ 선생님과 제자, 권위와 평화가 머무는 자리

쉬는 날 울리는 학부모의 카톡,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 지도교수… 권위 관계에서 반복되는 자책과 원망의 패턴을 짚어보는 심리 칼럼 시리즈 열두 번째 이야기.

선생과 제자 사이에는 늘 권위와 기대가 함께 놓여 있다. 그 자리에서 요구받거나 방치될 때, 마음은 자책과 원망 사이를 오간다.

사례 1 — “선생님, 여쭤볼 게 있어요”

퇴근 후나 쉬고 있는 공휴일, 스마트폰 화면에 카톡 알람이 울린다. 학부모나 학생이 보낸 메시지다.

“선생님, 수행평가 관련해서 여쭤볼 게 있어요.” “아이 태도가 요즘 걱정되는데 통화 가능하실까요?”

쉴 권리를 침해받았다는 짜증이 올라온다. “네, 어머니, 어떤 부분이 궁금하실까요?”라며 친절하게 답하지만, 속으로는 짜증과 피로감이 밀려와 한숨이 나온다.

그러다 이내 화살을 자신에게 돌려 가혹하게 채찍질한다.

‘선생으로서 학생과 학부모 응대를 이 정도도 유연하게 소화하지 못하고 짜증부터 내는 내 좁은 그릇 탓이지.’ ‘평소에 학부모와의 소통을 더 매끄럽게 해두지 못한 내 처세술 부족 때문이야.’

모든 책임을 자신의 역량 부족으로 돌리는 1차 자책이다.

그러다 그 자책이 억울함으로 바뀔 때, 마음은 방어적으로 화살을 바깥으로 돌린다.

‘교사의 사생활이나 워라밸은 존중 안 하고 쉬는데 예의 없이 연락하는 이기적인 학부모야.’ ‘선생을 24시간 대기조 콜센터로 아는 무개념 진상들이야.’

상대방을 탓하는 2차 전가가 일어난다.

무의식적 반응과 반복되는 패턴

쉬는 날 날아오는 업무 관련 카톡을 마주할 때, 나를 괴롭히는 진짜 실체는 그 메시지와 내용 그 자체가 아니다.

그 기저에는 “내가 상대의 요구에 즉각 응하지 않으면, 나는 불성실한 교사로 생각되거나 학부모에게 원망을 듣고 결국 평가에서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깊은 불안과 완벽주의적 강박이 자리 잡고 있다.

상대의 늦은 연락은 그 사람의 개념 상실이나 불안정한 성향을 보여줄 뿐인데, ‘학부모가 쉬는 날 나를 찾은 것은 내가 평소에 교사로서 신뢰를 주지 못했거나 만만하게 보이기 때문’이라는 내 안의 가혹한 잣대를 투사하여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 알림 하나에 노예처럼 쪼아대며 스스로 자책하고, 억울해지면 상대를 배려 없는 사람으로 몰아세우는 상황이 반복된다.

마음의 맥점 짚기

카톡창을 보며 고민하는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카톡과 내용은 내 마음의 방어막을 뚫는 방아쇠일 뿐, 그 화살을 맞아주며 스스로를 쥐어짜고 상대방을 원망하게 만드는 장본인은 결국 내 안의 ‘모든 사람에게 좋은 선생님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과 상대에게 거절하지 못하는 취약성이다.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은 학부모나 학생의 무례한 연락이 아니라, “내 삶의 소중한 휴식과 경계선을 당당하게 지켜내지 못하고 상대의 스마트폰 독재에 무너지던 내 안의 태도”다.

해결과 해소의 단계

1. 알아차림(멈춤)

쉬는 날 울리는 알림과 함께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자책의 바람이 불어올 때, 잠시 멈추고 내면을 응시한다.

“아, 오늘도 내 안의 완벽주의와 좋은 교사여야 한다는 강박이 또 나를 흔들며 쉴 권리를 뺏어 가고 있구나” 하고 그 흐름을 객관적으로 본다.

2. 소유권 회복(화살 거두기)

상대에게 씌웠던 진상 프레임을 거두고, 그 화살을 내면으로 돌려 카톡에 스트레스받는 내면의 자아를 다독이며 바라본다.

3. 수용과 통합

부족하다고 자책하던 나도, 분노하던 나도 모두 안아준다.

밖을 향하던 방어의 칼을 거두고, 업무와 상담은 정해진 근무 시간에만 응하겠다는 단단한 경계선을 세우며 스스로의 평온을 지켜낸다.

사례 2 — “네가 스스로 한번 고민해 봐라”

오랫동안 고민하고 준비한 연구 주제나 논문 방향을 들고 지도교수를 찾아간다. 하지만 명확한 피드백이나 가이드를 주는 대신, 구체적인 조언은 쏙 빼놓은 채 수개월 동안 결론을 내주지 않고 오랫동안 붙잡아 둔다.

“그건 네가 스스로 한번 깊게 고민해 보고 답을 찾아봐라.” “아직 방향이 잘 안 잡혔으니 더 연구해 오라.”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오히려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게 된 상황에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해진다. 겉으로는 “네, 알겠습니다.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라며 연구실을 나오지만, 속으로는 시간만 흘러간다는 초조함과 억울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러다 이내 화살을 자신에게 돌려 가혹하게 채찍질한다.

‘교수님께서 스스로 해보라고 기회를 줬는데도 혼자 해결하지 못하고 헤매는 내 멍청하고 무능한 탓이지.’ ‘교수님 지도 없이 주도적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내 부족한 역량 때문이야.’

모든 책임을 자신의 실력 부족으로 돌리는 1차 자책이다.

그러다 그 자책이 억울함으로 바뀔 때, 마음은 방어적으로 화살을 밖으로 돌린다.

‘제자를 제대로 지도할 능력도 열정도 없으면서 방치하는 무책임한 꼰대 교수야.’ ‘시간만 낭비하게 만들고 사람 말려 죽이는 악질적인 지도 방식이야.’

스승을 무책임한 방관자로 만들고 탓하는 2차 전가가 일어난다.

무의식적 반응과 반복되는 패턴

명확한 길을 주지 않는 지도교수의 태도를 마주할 때, 나를 괴롭히는 진짜 실체는 그 연구의 정체 자체가 아니다.

그 기저에는 ‘권위 있는 어른이 확실한 정답이나 승인을 주지 않으면, 나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결국 막힐 것’이라는 깊은 유아적 의존성과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

교수의 방임적 태도는 그 사람의 지도 스타일 부재나 무관심을 보여줄 뿐인데, ‘교수님이 방향을 안 잡아준 것은 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구제불능의 학생이기 때문’이라는 내 안의 비참한 잣대를 투사하여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어른의 허락과 정답을 기다리며 스스로 자책하다가, 그 무력감이 억울해지면 상대를 무책임한 방관자로 몰아세우는 소모적인 상태가 반복된다.

마음의 맥점 짚기

교수의 입에서 시원한 정답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전전긍긍하거나 속으로 원망을 키우는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 방임은 방어막을 뚫는 방아쇠일 뿐, 그 화살을 맞아주며 스스로를 짓밟고 교수를 원망하게 만드는 장본인은 결국 내 안의 ‘누군가 길을 터주어야만 움직일 수 있다’는 수동적 의존성과 불안이다.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은 교수의 무책임한 태도가 아니라, ‘어른의 승인과 가이드가 없다는 핑계로 내 연구와 인생의 주도권을 스스로 손에 쥐지 못하고 방치하던 내 안의 태도’다.

해결과 해소의 단계

1. 알아차림(멈춤)

답답함과 초조함이 밀려올 때, 잠시 멈추고 내면을 응시한다.

“아, 오늘도 내 안의 의존성과 정답을 바라는 불안이 또 나를 흔들며 멈춰 서게 만들고 있구나” 하고 그 흐름을 객관적으로 짚어본다.

2. 소유권 회복(화살 거두기)

교수에게 씌웠던 방관자 프레임을 거두고, 그 화살을 내면으로 돌려 방향을 잃고 헤매며 불안해하는 내면의 연구자를 다독이며 바라본다.

3. 수용과 통합

무능하다고 자책하던 나도, 억울해하던 나도 모두 안아준다.

밖을 향하던 방어의 칼을 거두고, 교수의 피드백이 없더라도 이제는 내 소신과 판단을 믿고 한 걸음씩 스스로 연구의 방향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단단한 주체성을 세운다.

MT News 주간 브리핑

매주 월요일 아침, 의료관광·유치산업의 핵심 이슈를 5분 분량으로 정리해 보내드립니다.